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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야산 / 伽倻山 / Gayasan(Mt) 

  • 가야산으로

    • 가야산은

      충남 예산군(禮山郡) 덕산면(德山面)과 서산시(瑞山市) 해미면(海美面)·운산면(雲山面)에 걸쳐 있는 산으로, 산 높이는 해발 678미터이다. 주봉인 가야봉과 더불어 원효봉·석문봉·옥양봉·일락산·수정봉 등의 봉우리가 늘어서 있고. 용현계곡쪽에 서산마애삼존불·보원사지, 상가리쪽에 보덕사·남연군묘, 그 밖에 개심사·일락사 등이 있다. 

    • 가야산 가는 길

      [대중교통] 
      ¶ 예산종합터미널 -> 군내/시외버스로 덕산 ->군내버스로 상가리 (보덕사, 남연군묘, 가야산) 
      ¶ 서산공영버스터미널 -> 시내/시외버스로 운산 -> 시내버스로 용현계곡, 서산마애삼존불상 
      ¶ 서산공영버스터미널 -> 시내/시외버스로 운산/해미 -> 시내버스로 개심사 
      ¶ 서산공영버스터미널 -> 시내/시외버스로 운산 -> 시내버스로 일락사 

      [자가운전] 
      ¶ 서해안고속국도 해미나들목 -> 45번 국도 타고 덕산 -> 옥계저수지 -> 상가리 
      ¶ 서해안고속국도 서산나들목 -> 32번국도 타고 운산 -> 고풍리 서산마애삼존불상 
      ¶ 서해안고속국도 서산/해미나들목 -> 32번국도 운산 -> 647번도로 신창리 -> 개심사 
      ¶ 서해안고속국도 해미나들목 -> 황락리 -> 일락사 

    • 가야산 안내도 

        

    • 산행코스

      ¶ 남연군묘-상가저수지-헬기장-가야봉돌음길-석문봉-옥양봉-남연군묘(3시간 30분) 
      ¶ 남연군묘-상가저수지-석문봉-옥양봉-남연군묘 
      ¶ 마애삼존불상-수정봉-옥양봉-석문봉-일락산-보원사터 
      ¶ 일락사-석문봉 

  • 가야산에 들어

    • 상가(上加)저수지에서 바라본 가야산 

       


    • 가야봉(伽倻峰)~석문봉(石門峰)~옥양봉(玉洋峰)

      석문봉에서 일락사 가는 길과 옥양봉에서 수정봉 가는 길을 알리는 팻말이 있다.

      석문봉 가는 길에서 뒤돌아본 가야봉 석문봉과 그 언저리

      석문봉 언저리 (일락산 쪽) 옥양봉에서 바라본 옥계저수지 쪽 풍경


    • 가야산의 봄꽃과 옥계저수지의 철새

        


    • 가야산 기슭의 절

      보덕사(報德寺) : 1871년(고종8년) 흥선대원군은 가야산 동쪽 골짜기에 보덕사를 세워 초대 주지 도문(道文)에게 남연군묘 수호일품대승(守護一品大僧)이라는 직책을 내려 묘를 돌보게 하였다. 한국전쟁때 불타 없어지고 지금은 비구니절이 들어서 있다. 남연군묘와 가까운 곳에 자리잡고 있지만 산자락에 가려 서로 마주보는 일은 없다. 

      개심사(開心寺) : 백제 의자왕 9년(649년)에 혜감국사(慧鑑國師)가 창건한 절. 비뚤어진 나무를 기둥으로 살려 쓴 게 눈에 띈다. 대웅전 앞뜰은 당우로 둘러싸여 닫힌 공간이지만 대웅전 맞은편 건물 속을 비우고 창을 여럿 뚫어 바깥 풍경과 서로 통하게 했다. 마음의 창들을 모조리 열어젖히면 가없는 기쁨이 찾아오리라는 뜻으로 절이름을 개심(開心)이라 지었을까.  § 개심사 사진 더 보기

      보원사터[普願寺址] : 용현계곡 마애삼존불에서 안으로 조금 더 들어가면 백제시대의 절로 추정되는 보원사터가 나온다. 

      보덕사 개심사 보원사터


    • 남연군묘(南延君墓)

      석파(石坡) 이하응(李昰應, 1820~1898, 1863년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에 봉해짐)은 1844년 경기도 연천 남송정에 있던 부친 남연군 이구(李球)의 무덤을 충남 가야산 가야사 자리로 옮겼다. 상여가 지나는 고을마다 그 고을 사람들이 상여를 이어 받아 운구하였으니 5백리길이었다. 충청도 덕산땅에 2대에 걸쳐 천자가 나올 자리[二代天子之地]가 있다는 풍수가의 말을 듣고 가야사를 불살랐다고 한다. 1868년 독일인 오페르트(Ernst Oppert)가 이 묘를 도굴하려다 미수에 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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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연군묘

가야산의 산세가 남연군 묘쪽으로 쏠리는 것을 볼 수 있다.

    • 가야산 자락 서산마애삼존불상(瑞山磨崖三尊佛像)

      가야산 용현계곡에 백제의 미소를 머금은 마애삼존불상(국보제84호)이 있다. 빛의 방향에 따라 웃는 모습이 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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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마애삼존불



  • 가야산을 되돌아보며

    • 생각나는 대로 1

      2005년 3월 서산마애삼존불과 보원사터, 개심사를 둘러보았다.
      2007년 2월 남연군묘-가야봉쪽릉선-석문봉-옥양봉-남연군묘 코스로 가야산에 다녀왔다.

      겨울 옥계저수지에 철새들이 많았다. 

      흥선대원군은 마음만 먹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해내는 스타일인 듯하다. 버젓이 자리잡고 있던 가야사를 불사르고 부친 남연군을 이장한 것을 보면 말이다... 하기사 조선조때 풍수가의 영향을 받아 사찰터까지 탐낸 유생들이 어디 한둘이랴만 

      가야산 가야봉에는 송신탑이 세워져 있어 올라가지 못하고 돌음길로 지나다녀야 한다. 

      남연군묘 지구와 용현계곡 지구, 개심사는 다 가야산 자락에 있지만 교통편이 달라 각기 다른 산에 가는 것처럼 찾아가야 한다. 

      2007년 2월 해미에서 덕산 가는 4차선 새길이 뚫려 있었다. 터널도 새로 뚫리고... 전에 비해 시간이 단축되었다. 
    • 생각나는 대로 2

      백제의 미소를 머금은 서산마애삼존불을 보자 일본 법륭사의 백제관음이 생각나...자료를 정리해 본다. 

      아스카시대(7세기초)의 문화재를 고스란히 보존하여 지금 우리가 다시 볼 수 있다니 일본에 고마움을 느끼는 한편으로 그 옛날의 빛나는 우리 문화유산은 다 어떻게 되었는지 생각하면 한숨이 절로 나온다. 법륭사[Horyuji] 백제관음이 백제에서 만들어졌는지 일본에서 만들어졌는지 여태껏 밝혀지지 않았다. 하지만 아스카시대의 문화재는 거의 백제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자~ 사진으로나마 백제의 숨결을 느껴보자. 숨막힐 듯한 아름다움과 우아함을... 

      아래는 법륭사 발행 '백제관음' 소책자 스캔 [일본 나라 법륭사 백제관음](日本 奈良 法隆寺 百濟觀音)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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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제관음

      백제관음


      [일본 (田+丁)田甲一씨의 백제관음(百濟觀音) 해설] 

      백제관음에 대한 기록이 옛문헌에는 나오지 않는다. 11세기 후반의 『금당불상등목록(金堂佛像等目錄)』이나 카마쿠라[鎌倉]시대의 『성덕태자전사기(聖德太子傳私記)』에도 언급이 없다. 

      에도[江戶]시대의 『원록제당불체수량기(元祿諸堂佛體數量記)』에 '허공장보살(虛空藏菩薩)은 백제국(百濟國)으로부터 건너온 천축상(天竺像)이다'라는 기록이 처음으로 보인다. 『고금일양집(古今一陽集)』에는 '허공장보살(장7척남짓)은 그 기인(起因)에 대한 옛기록이 없다. 옛노인들이 전하기를 외국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한다. 그 연유는 알 수 없다.'는 기록이 보인다. 아마도 이는 오각형 대좌 아래에, 후세(後世)에 고재(古材)를 가지고 만들어 붙인 오각형 화광(테두리 부재?) 뒷면에 '허공장대륜(虛空藏臺輪)'이라는 붓글씨 새김이 있는 것을 참조하여, 이 불상(백제관음)에 관해 기록한 것으로 추측된다. 이 '허공장대륜'이라 쓰인 부재는 나중[後]에 기운[補] 것이고 '불체수량기(佛體數量記)'나 '고금일양집(古今一陽集)'도 근세의 것이다. 명치시대에서야 발견된 보관(寶冠)에 화불(化佛, 보관의 조그마한 불상; 보관의 화불과 손에든 정병이나 연꽃은 관음상의 특징임)이 밝혀졌기 때문에 '허공장보살'이라는 호칭도 당초부터 불리던 것이 아님이 명백하다. 

      아스카[飛鳥]시대와 관련된 여러 불상들이 도상(圖像)에서 관음보살상이라고 추정됨에도 불구하고, 사찰측에서는 옛적부터 이 불상을 '허공장보살'이라 부르며 전해져왔다고 한다. 성덕태자와 인연이 깊은 이 사찰에 옛적부터 허공장보살로서 전해져왔다는 사실로 봐서 카마쿠라시대 이전에 이미 이 불상이 법륭사에 존재했다는 주장도 있으나, 문헌상으로는 카마쿠라시대 이후 17세기말 사이에 법륭사로 옮겨져 온 것으로 추측할 수 밖에 없다. [출처: 1993년 법륭사 발행 '백제관음' 소책자] 


      [評] 

      절(법륭사)에서는 백제관음이 허공장보살이라 불리며 오래전부터 전해내려왔다는데, 학자들은 굳이 옛문서에 기록이 없고 허공장보살이라는 명칭의 근거도 명확하지 않음을 내세워 백제관음이 일본에서 만들어진 불상임을 주장할 수도 있는 논리적 바탕을 만들어 놓고 있다. 우리나라라면 근원이 불분명할 경우 불상을 보관하고 있는(던) 절측의 의견을 따를 수도 있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기록을 잘 하는 일본의 국민성에다 방대한 문화재 연구를 쌓아놓은 일본임을 감안하면 일본측의 해설 또는 주장은 또다른 증거 없이는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실질적이고 유효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일본의 입장에서야 이 빼어난 불상이 일본에서 만들어진 것이라는 증거가 나오면 얼마나 환호하겠는가? 지금은 이 불상의 아름다움만 보자. 이 불상이 백제산인지 일본산인지는 학자들의 몫으로 남겨두자. 대한민국 고문화재 연구원들 힘내시길 ! 



      [기억]

      1996년 일본 법륭사. 며칠간 쿄토·나라·아스카·오사카 등지를 둘러보던 때였다. (대중교통편 특히 전철이 서로 잘 연결되어 있었다) 백제관음은 법륭사의 한 회랑에 외기에 접한 채 서 있었다. 수많은 일본인들이 백제관음에 대해 시·수필 등 글을 남긴 바 있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이 목조불상이 이런 자리에 이렇게 보존되고 있다니 좀 놀랐다. 다른 불상들이 각 당우마다 이미 자리잡고 있어 백제관음을 안치할 관음당을 건립하기 위해 모금하고 있었다. 하지만 수십년 수백년 동안 백제관음을 단독으로 모실만한 실내공간을 만들지 않았다는 게 쉽사리 이해되지 않았다. 그날은 저녁무렵이라선지 백제관음 관람객이 거의 없어 호젓하게 혼자서 백제관음을 바라볼 수 있었다. 백제관음은 얼굴이 퉁퉁 부은 불상이 아니라 시골길 가다 흔히 마주칠 것 같은 사람 냄새 나는 형상으로 다가왔다. 부드러움, 우아함 뭐라 표현할 수 없는 감동 아니 전율이 전해져 왔다. 인간의 예술이 이런 경지에까지 오르는 구나. 인간이란 존재를 다시 생각하게 할 정도였다. 

      백제관음은 호리병을 들고 있다 / 이 양반, 그 병에 아무것도 넣지 않았으리 / 삶의 기쁨도 도취의 술도 넣지 않았으리 / 하지만 보라, 아주 가벼워 보이는 그 병에 / 삼천대천세계를...[高橋新吉의 詩] 

      [2007-03-30 작성] [2012-09-04 티스토리로 편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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