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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필이 말하는 상(常)이란 무엇인가 - 노자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만한 것들 (5) / 2024년 9월 초적 작성

1. 상(常)이란

△ '노자' 원문의 상(常)


  • 조화로움[和]을 상(常)이라 하고 조화로움[和]을 아는 것을 밝음[明]이라 한다. 《노자55장 죽간본 및 백서갑본》
  • 조화로움[和]을 아는 것을 상(常)이라 하고 상(常)을 아는 것을 밝음[明]이라 한다. 《노자55장 왕필본 및 백서을본》
  • 천명으로 돌아감[復命]을 상(常)이라 하고 상(常)을 아는 것을 밝음[明]이라 한다. 《노자16장 왕필본》

  • 노자55장 백서갑본 및 죽간본의 화왈상(和曰常)-지화왈명(知和曰明)이 왕필본에서 지화왈상(知和曰常)-지상왈명(知常曰明)으로 바뀌었다. (결과적으로) 노자16장의 지상왈명(知常曰明)과 같게 되었다.
  • 만물은 무성하게 자라지만 저마다 그 뿌리[비롯된 곳]로 돌아가며 뿌리로 돌아감을 고요함[靜]이라 한다. 이를 일러 복명(復命)이라 하며 복명은 상(常)이고 상을 아는 것은 밝음[明]이다. 《노자16장 왕필본》
  • 갓난아기는 종일 울어도 목이 쉬지 않으니 조화[和]가 지극한 것이다. 조화를 아는 것을 상(常)이라 하고, 상을 아는 것을 명(明)이라 한다. 《노자55장 왕필본》
  • 조화로움[和]과 복명(復命)이 상(常)이다.

 

△ '왕필주'의 상(常)


  • 제 명으로 돌아가면[復命] 천성과 천명의 상(常)을 얻으므로 상(常)이라고 한다. 상(常)이라고 하는 것은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밝게 드러내지 않으며[不偏不彰],밝게 빛나거나 어두운 상[皦昧之狀]도 없고, 따뜻하거나 서늘한 상[溫涼之象]도 없다. 그러므로 상(常)을 아는 것을 밝음[明]이라고 한 것이다. 《노자16장 왕필주》
  • 만물은 조화로움[和]을 상(常)으로 삼으므로 조화로움[和]을 알면 상(常)을 얻는다. 상(常)을 아는 것을 밝음[明]이라 한다. 밝게 빛나거나 어둑하지도 않으며[不皦不昧] 따뜻하지도 서늘하지도 않은[不溫不涼] 것이 이 상(常)이다. 형상이 없는 것[無形]은 볼 수 없으니 밝음[明]이라 한 것이다.* 《노자55장 왕필주》

  • 노자 원문에서 상(常)은 복명(復命)과 조화로움[和, 知和]이지만, 왕필 주에서는 (그에 더해) 불편불창(不偏不彰), 불교불매(不皦不昧), 불온불량(不溫不涼)도 상(常)이라고 하였다.
  • 화(和)에는 조화, 융합, 상응 등의 기본 뜻 외에 딱딱하지도 않고 부드럽지도 않음[不堅不柔], 억세지도 않고 부드럽지도 않음[不剛不柔]의 뜻도 포함되어 있다.
  • * ('상(常)을 아는 것은 밝음[明]'이라는 말에서 상(常)은 무형(無形)이고) 무형은 볼 수 없으니 밝음이라 한 것이다. 환언하면, 무형을 볼 수 없으니 무형을 보는 것 곧 상을 아는 것이 밝음이라는 뜻이다. [노자55장 왕필주에 대한 초적주]
  • 소리가 없는 것[無聲]을 듣고 형상이 없는 것[無形]을 보면 밝음(明, 총명)이라 한다. 《노자33장 하상공주 편집》
  • 조화로움[和], 복명(復命), 불편불창(不偏不彰), 불교불매(不皦不昧), 불온불량(不溫不涼)이 상(常)이다.

 

△ '노자지략'의 상(常)


  • 옛것과 오늘날의 것이 통하고[古今通]*①, 마침과 비롯이 같으며[終始同]*②, 옛것을 잡아 오늘날의 것을 제어할 수 있고[執古可以御今]*③, 오늘날의 것을 증험하면 옛 비롯을 알 수 있으니[證今可以知古始]*④ 이는 이른바 "상(常)"이라는 것이다. (불언으로 변화시키는 성인처럼) 밝게 빛나거나 어둑한 상[皦昧之狀]이 없고, (무물을 사용하는 하늘처럼) 따뜻하거나 서늘한 상[溫涼之象]이 없으므로 "상을 아는 것을 밝음[知常曰明]이라 한다"라고 하였다. 만물이 생성되고 공업이 이루어짐에 이것으로 말미암지 않은 것이 없나니 그래서 "이로써 중보(만물의 비롯)를 살필 수 있다"라고 하였다. 《노자지략》

  • 노자지략에서는 노자 원문의 복명(復命)과 조화로움[和]에 대한 언급 없이 왕필 주에서 추가되었던 불교불매(不皦不昧), 불온불량(不溫不涼)에 더해, 고금통(古今通), 종시동(終始同), 집고가이어금(執古可以御今), 증금가이지고시(證今可以知古始)가 상(常)이라고 하였다.
  • *① 고금통(古今通) : 비록 옛날과 지금이 같지 않고 시대에 따라 풍속이 바뀌어도 이것은 변하지 않으니 이른바 "예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이름이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노자지략》
  • *② 종시동(終始同) : 노자의 글은 끝마침[終]에 근거하여 비롯[始]을 증명하고 비롯[始]을 근본으로 하여 끝마침[終]을 다한다. (길을) 열되 도달시키지 않고 길잡이 노릇은 하되 억지로 이끌지 않으며, 탐구한 뒤에 그 뜻의 궁극에 다다르고, 추론한 뒤에 그 이치를 따져 깊이 생각하며, 사물의 비롯[시원]을 잘 추적하여 그 논의를 시작하고 그 귀결을 밝혀 글을 마친다. ... 저 길이 비록 다르더라도 반드시 돌아가는 곳을 동일하게 하고, 궁리[모색]가 비록 백가지이더라도 반드시 다다른 곳을 같게 하여, 귀착점이 일치됨을 근거로 지극한 이치를 밝힌다. 《노자지략》
  • *③ 집고어금(執古御今) : 무형무명이 만물의 종조이다。비록 옛날과 오늘날이 같지 않고 세월이 흘러 풍속이 바뀌었지만,예로부터 이것으로 말미암지 않고서 그 다스림에 성공한 자는 없었다。그러므로 옛날의 도를 잡아 오늘날의 일을 제어할 수 있다. 《노자14장 왕필주)
  • *④ 증금지고시(證今知古始) : 태고는 비록 멀지만,그 도는 (여기에, 거기에) 존재하므로,비록 오늘날에 존재해도(살아도) 옛날의 비롯(시원)을 알 수 있다. 《노자14장 왕필주》
  • 불교불매(不皦不昧), 불온불량(不溫不涼), 고금통(古今通), 종시동(終始同), 집고가이어금(執古可以御今), 증금가이지고시(證今可以知古始)가 상(常)이다.


2. 왕필의 상(常) 추적 (초적의 주관적 추정)


△ 바뀌지 않는[不改] 것 ; 되돌아가고 화육하며 마침과 비롯[終始]이 같은 것 ; 반화종시(返化終始)


  • (근본으로) 되돌아가게 하고, (스스로) 변화하게 하며, (비롯된 곳으로 돌아가) 끝마치도록 하고, (만물의) 비롯이 되니, 그 상(常)을 잃지 않으므로 바뀌지(변하지) 않는다고 한 것이다[返化終始,不失其常, 故曰不改也]. 《노자25장 왕필주》
  • (다스리는) 일과 만물(의 생성)에는 종주(宗主)가 있다. 길이 설령 다르더라도 돌아가는 곳은 같고, 궁리(모색)가 설령 백가지이더라도 이르는 곳은 하나이다. 도에는 큰 상(常)이 있고 이치에는 큰 다다름이 있다. 옛날의 도를 잡아 오늘을 제어할 수 있고, 비록 오늘에 처해 있어도 옛날의 비롯을 알 수 있으니, 문밖을 나가지 않고 창밖을 엿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노자47장 왕필주》
  • 옛것과 오늘날의 것이 통하고[古今通], 마침과 비롯이 같으며[終始同], 옛것을 잡아 오늘날의 것을 제어할 수 있고[執古可以御今], 오늘날의 것을 증험하면 옛 비롯을 알 수 있으니[證今可以知古始] 이는 이른바 "상(常)"이라는 것이다. 《노자지략》 - 앞서 언급한 내용과 중복

  • 종시동(終始同) : 이들 셋은 항상 끝으로 돌아간[反終] 뒤에라야 덕(德)이 그 머무는 곳을 온전하게 함을 말한다. 아래의 장에서 되돌아가는 것이 도의 움직임[反者道之動]이라고 말했다. 공을 가져서는 안 되고 항상 그 어미[근본]에 처한다. 《노자28장 왕필주》 / 만물은 무명(無名), 무형(無形), 미(微)에서 비롯[始]된다. 《노자1장 왕필주》 / 뿌리를 도모한 뒤에 말단을 경영해야 그 끝마침[終]을 획득한다. 《노자59장 왕필주》 / '뿌리를 도모함'이란 어미를 지킴[守其母], 비롯된 곳으로 돌아감[反其所始], 근본으로 돌아감[復歸其根], 천명으로 돌아감[復命], 영아(嬰兒)·무극(無極)·박(樸)으로 복귀함, 무위로 돌아감[反無爲] 등을 말한다. 끝마침[終]은 결국 비롯[始]으로 귀결된다. [왕필주에 대한 초적주]
  • 바뀌지 않는다는 것은 변화에 상(常)이 있다는 뜻이다[不改者,化有常]. 《노자25장 하상공주》
  • 도(道)의 (큰) 상(常)은 반화종시(返化終始)이다.

△ 항구불변(不變)성 ; 예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自古及今] 변하지 않는 것 ; 무명(無名)


  • 예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自古及今] 그 이름이 사라진 적이 없어 그로써 만물의 비롯[衆甫]을 살펴볼 수 있다. 《노자21장》
  • 무명(無名)이 곧 그 이름이며 예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自古及今] 이로 말미암아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없다. 《노자21장 왕필주》
  • 비록 옛날과 오늘날이 같지 않고 시대에 따라 풍속이 바뀌어도 이것은 변하지 않으니 이른바 "예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이름이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노자지략》
  • 도는 무형(無形)이라 상(常)에 매이지 않으므로 이름을 붙일 수 없다. 무명(無名)을 상(常)으로 삼으니 도상무명(道常無名)이라 한 것이다. 《노자32장 왕필 주》

  • 도(道)의 상(常)은 무명(無名)이다.

△ 드러나지 않는 것들 ; 치우치지 않고 모두를 아울러 포용할 수 있는 것 [和] ; 무형(無形)


  • 대상무형(大象無形)
    (그것은) 눈으로 볼 수 없으니 상(象)이 되면 무형(無形)이다. 《노자지략》 / (도라는 것은) 상(象)에 있어서는 대상(大象)이 되지만 대상(大象)은 형상이 없다[無形]. ...형상이 있으면 나뉨(구분)이 있게 되고, 구분이 있는 것은 따뜻하지[溫] 않으면 뜨겁고[炎] 뜨겁지 않으면 차다[寒]. 그러므로 상(象)이면서 드러난[形] 것은 대상(大象)이 아니다. 《노자41장 왕필주》 / 대상(大象)은 천상(天象)의 어미이다. ... 형상도 표식도 없고[無形無識], 한쪽으로 치우치지도 밝게 드러내지도 않는다[不偏不彰]. 《노자35장 왕필 주》
  • 대음희성(大音希聲)
    (그것은) 귀로 들을 수 없으니 소리[音]가 되면 희성(希聲)이다. 《노자지략》 / (도라는 것은) 소리(音)에 있어서는 대음(大音)이 되지만 대음(大音)은 소리가 없다[希聲]. ...소리[聲]가 있으면 나뉨(구분)이 있고 구분이 있으면 궁성[宮] 아니면 상성[商]이 된다. 나뉨이 있으면 무리를 통솔할 수 없으므로 소리[聲]가 있으면(발생하면) 대음(大音)이 아니다. 《노자41장 왕필주》

  • 상(常)은 불편불창(不偏不彰), 불교불매不(不皦不昧), 불온불량(不溫不涼)이다. 《노자16장 왕필주 편집》
  • 상(常)은 불교불매(不皦不昧), 불온불량(不溫不涼)이다. 《노자55장 왕필주 및 노자지략 편집》
  • (도는) 적료(寂寥)하여 형체가 없다[無形體]. 《노자25장 왕필 주》
  • 만물은 도로써 이루어지지만 도가 형상을 이루는 것을 보지 못하므로 도은무명(道隱無名)이다. 《노자41장 왕필주》
  • (그것은) 궁소리도 아니고 상소리도 아니며[不宮不商] 들으려해도 들을 수 없으니 ... 소리(音)가 되면 희성(希聲)이다. 《노자지략 발췌》
  • 왕필은 감각기관[耳目口體]별 도(道)의 화신을 대음희성[耳]과 대상무형[目], 그리고 무형(無形)으로 통합 정리하였다. 무형(無形)={무형(無形)·희성(希聲)·무물(無物) 등}
  • 도(道)의 상(常)은 무형(無形)이다 - 불편불창(不偏不彰), 불교불매(不皦不昧), 불온불량(不溫不涼), 불궁불상(不宮不商) 등

△ 드러나지 않는 것을 보는 것 ; 무형(無形)을 본다는 것은 곧 상(常)을 안다는 것 ; 무형(無形)의 활용


  • 대상무형(大象無形)과 하늘[天] 그리고 무물(無物)
    만약 따뜻하다면 서늘할 수 없다. 형상[形]은 반드시 나뉘는 바(구분)가 있다. 그러므로 상(象)이면서 (특정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대상(大象)이 아니다. 그러나 사상(四象)이 드러나지(보이지) 않는다면 대상(大象)이 창달할(하늘에서 내려올) 방법이 없다. 사상(四象)이 드러나되 사물에 주장하는 바가 없다면 대상(大象)이 창달할 것이다. 그러므로 대상(大象)을 잡으면 천하가 (제대로) 간다고 한 것이다. 무형(無形) 곧 대상(大象)이 창달하여 천하가 비록 (제대로) 갈지라도 (사람들은) 능히 그러한 줄 알아채지 못한다. 그러므로 하늘은 다섯 가지 물건[五物]을 낳아도 무물(無物)을 쓰임으로 삼는다. 이 때문에 이름지어 붙일 수 있는 이름은 상명(常名)이 아니다[名可名非常名]라고 한 것이다. 다섯 물건[五物]의 어미[무물(無物)을 사용하는 하늘]는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고[不炎不寒] 부드럽지도 뻣세지도 않다[不柔不剛]. 《노자지략》
  • 대음희성(大音希聲)과 성인[聖] 그리고 불언(不言)
    궁(宮)이라는 소리라면 상(商)이라는 소리가 될 수 없다. 소리[聲]는 반드시 속하는 데가 있다. 소리[音]이면서 (특정한) 소리[聲]를 내는 것은 대음(大音)이 아니다. 오음(五音)이 소리가 나지(들리지) 않는다면 대음(大音)이 도달할(이 땅에 영향을 미칠) 방법이 없다. 그러나 오음(五音)이 소리가 나되 마음에 딱 들어 맞는 바가 없다면 대음(大音)이 도달할 것이다. 대음(大音)을 쓰면 풍속이 바뀐다. 희성(希聲) 곧 대음(大音)이 도달하여 풍속이 비록 바뀔지라도 (사람들은) 능히 그러한 줄 변별하지 못한다. 이 때문에 성인은 다섯 가지 가르침[五敎]을 행해도 불언(不言)을 교화(의 방법으)로 삼는다. 이 때문에 말해질 수 있는 도는 상도(常道)가 아니다[道可道非常道]라고 한 것이다. 다섯 가르침[五教]의 어미[불언(不言)으로 교화하는 성인]는 밝게 빛나지도 어둑하지도 않고[不皦不昧], 은혜를 베풀지도 상해를 입히지도 않는다[不恩不傷]. 《노자지략》 /
  • 상(常)을 아는 것을 밝음[明]이라 한다. 《노자16장 및 노자55장 왕필본》 / 형상이 없어[無形] 볼 수 없는 것을 밝음[明]이라 한다. 《노자55장 왕필주》 / 소리가 없는 것[無聲]을 듣고 형상이 없는 것[無形]을 보는 것을 밝음(明, 총명)이라고 한다. 《노자33장 하상공주 편집》

  • '상(常)을 아는 것'과 '무형(無形)을 보는 것'을 공히 밝음(明)이라 한다. -> 무물(無物)의 사용, 불언(不言)의 교화

3. 상(常)의 용례


△ 도(道)의 상(常)의 용례

  • 말해질 수 있는 도는 무형[희성]의 도[常道]가 아니요 이름지어 붙일 수 있는 이름은 무형[무물]의 이름[常名]이 아니다. 《노자1장》 / ※ 말해질 수 있는 도는 무형[대음희성-불언]의 도[常道]가 아니요 이름지어 붙일 수 있는 이름은 무형[대상무형-무물]의 이름[常名]이 아니다.
  • 말할 수 있는 도와 이름할 수 있는 이름은 (다스리는) 일을 가리키고 형상을 만들어내므로 그[道의] 상[常, 무형(희성, 무물)]이 아니다. 그러므로 말할 수도 없고 이름할 수도 없다. 《노자1장 왕필 주》
  • 노자 도편에 이르기를 "자를 지어 도라고 한다[字之曰道].", "그것을 일러 아득히 가물거린다[謂之曰玄]."라고 (말)했지 이름을 붙이지는 않았다. 그런즉 그것[道]을 말하는 자는 그[道의] 상[常, 무형(희성)]을 잃고, 그것[玄]에 이름을 붙이는 자는 그 참됨[실상]에서 떠나고[멀어지고], 그것을 (일부러) 하는 자는 그 천성[본성]을 망가뜨리고 그것을 틀어잡는 자는 그 원형을 잃는다. 이 때문에 성인은, 말을 주된 것으로 삼지 않는즉 (도의) 상[常, 무형(희성)]에 어긋나지 않고, 이름을 (도의) 상(常)으로 삼지 않는즉*★ 그 진실[본질]에서 멀어지지 않으며, 함[일부러 베풂]을 일삼지 않은 즉 (백성의) 천성을 망가뜨리지 않고, 틀어잡아 만들어내려고 하지 않으므로 그 원형을 잃지 않는다. 그런즉 '노자'의 글을 분변하여 따지려고[힐문하려고] 하는 자는 그 뜻[취지]를 놓칠 것이요, 이름으로 따지려고[책문하려고] 하는 자는 그 뜻[의의]과 어긋날 것이다. 《노자지략》
  • 도에는 큰 상[常, 반화종시]이 있고 이치에는 큰 다다름이 있다. 《노자47장 왕필주》

    ※ 도(道)의 상(常) : (바뀌지 않는) 반화종시(返化終始) / (항구불변적) 무명 / (드러나지 않는) 무형[희성, 무물]의, 무형[대음희성-불언]의, 무형[대상무형-무물]의
    *★ : 이름[名]을 상(常)으로 삼지 않는다[不以名爲常]는 것은 무명(無名)을 상(常)으로 삼는다는 것을 뒤집어 말한 것으로 보임. [초적주]

△ 기타 상(常)의 용례

  • 도는 항상 이름이 없다[道常無名]는 것은, 도는 능히 음양·성쇠(흥폐)·존망의 양면성을 다 가지고 있으므로 고정된(불변의) 이름[常名]이 없다는 뜻이다. 《노자32장 하상공주》
  • 만물은 절로 그러함[自然]을 천성[性]으로 삼는다. ... 만물은 일정한((앞 문장에 따라) 절로 그러한) 천성[常性]을 가지고 있는데 만들고 빚어내려고 하므로 반드시 망치게 된다는 것이다. 《노자29장 왕필주》
  • 도는 항상 무위한다[道常無爲]는 것은, 절로그러함[自然]을 따른다는 뜻이다. 《노자47장 왕필주》 / ※ 왕필은 노자32장의 도상무명(道常無名)을 '도는 무명을 상으로 삼는다'라고 풀이하였으나 노자47장의 도상무위(道常無爲)에 대해서는그렇게 풀이하지 않았다. 오히려 하상공이 도는 무위를 상으로 삼는다[道以無爲爲常]고 풀이하였다. 노자지략에서 무형은 5회, 무명은 4회, 무위는 1회 등장한다.

    ※ 상(常) : 항구한, 장구불변의, 보통의, 일반적인, 고정불변의, 일정한, 확고한 / 규칙, 규율, 윤리 / 늘, 항상

4. 초적 평(評)


  • 왕필은 상(常)의 개념을 확장시켰다.

    노자 원문의 상(常)이 왕필의 도덕경 주와 노자지략을 거치면서 그 의미를 넓혀 가는 것을 위에서 확인하였다. 왕필은 태고부터 무형무명인 (인간이 감각하지 못하는) 도를 오늘날의 유형적인 것에 어떻게 접목할 것인지를 고민하다가 무(無)와 유(有)의 매개체로 상(常)(이라는 개념의 확장)에 착안한 듯하다. 왕필에 따르면, 도(道)의 상(常)은 드러나지 않는 무형·무명이지만 그 상(常)을 아는 것[무형을 보는것]을 밝음(明)이라 하여 유무상생[무로써 유를 살림]을 상(常)이란 개념의 확장과 그 확장된 개념의 활용에서 찾아내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 왕필은 개념이 확장된 상(常)을 확대 적용하였다.

    노자 백서본과 왕필본 공히 상(常)으로 표기된 장은 노자16장, (52장), 55장이다. 백서본의 항(恆)이 왕필본에서 상(常)으로 바뀐 장은 노자1장, 2장, 3장, 27장, 28장, 32장, 34장, 37장, 46장, 48장, 49장, 51장, 61장, 64장, 65장, 74장, 79장이다. 기타 백서본의 항이 왕필본에서 삭제된 장(67, 76장)도 있다. 왕필은 도덕경 주에서 백서본 노자1장, 32장의 항(恆)을 자신이 정립(구축)한 상(常)으로 상정·적용하였다.

  • 왕필은 노자지략에서 무형(無形)·무명(無名)을 도(道)의 핵심 키워드로 삼았다.

    왕필의 노자지략은 '무릇 만물이 생겨나는 까닭과 공이 이루어지는 까닭은 반드시 무형(無形)에서 생겨나고 무명(無名)에서 말미암으니 무형·무명이 만물의 종조(근원)이다'로 시작된다. 도(道)의 상(常)이 무형무명이라 주장[초적의 주관적 추정]한 것과 맥이 닿아 있는 대목이라 하겠다. 한편, 왕필은 노자지략의 '숭본식말' 사례에서 무(無)의 쓸모됨으로 유(有)를 살려내는 것이 가능하다고 설파하였다.

  • 왕필은 감각기관[耳目口體]별 도(道)의 화신을 대음희성[耳]과 대상무형[目] 그리고 무형(無形)으로 통합 정리하였다.

    ▶ 귀로 들을 수 없으니 무성[무음성], 눈으로 볼 수 없으니 무색[무채색], 손으로 만질 수 없으니 무형[무형체]이라 한다. 《노자14장 하상공주》
    ▶ 귀로 들을 수 없으니 무성[희성], 눈으로 볼 수 없으니 무상[무상지상], 손으로 만질 수 없으니 무상[무물지상]이라 한다. 《노자14장 왕필주》
    ▶ 귀로 들을 수 없으니 희성, 눈으로 볼 수 없으니 무형, 몸으로 체감할 수 없으니 혼성[무물], 입으로 맛볼 수 없으니 무정[무미]이라 한다 《노자지략》
    대음은 희성[耳]이고 성인은 불언[口]이다. 대상[천상]은 무형[目]이고 하늘은 무물[體]이다. 무형·희성·불언·무물 등의 드러나지 않는 것들을 대표하여 무형(無形)이라 한다. [노자지략에 대한 초적주]

    왕필은 노자지략에서 눈으로 볼 수 없으니 상(象)이 되면 무형(無形)이라 하였고, 하상공은 노자14장 주에서 손으로 만질 수 없으니 무형(無形)·무형체(無形體)라고 하여 무형에 대해 서로 다른 견해를 보인다.

    노자14장에 (그것은) 무물(無物)로 다시 돌아간다. 이를 일러 무상지상(無狀之狀)·무물지상(無物之象)이라고 한다는 내용이 있고, 왕필은 '눈으로 보거나 몸으로 체험할 수 없으니 무상무상(無狀無象)이며, 밝게 빛나거나 어두운 상(狀)이 없고 따뜻하거나 서늘한 상(象)이 없다'고 주를 달았는 바, 이는 무물(無物)에 대음희성[불언으로 교화하는 성인은 밝게 빛나거나 어두운 상(狀)이 없음]과 대상무형[무물을 사용하는 하늘은 뜨겁거나 차가운 상(象)이 없음]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 (노자14장에서) 설명하였음에도 노자지략에서 무물을 하늘에만 관련지어 설명한 점은 상(常)을 새로이 정립·구축하는 과정에서 용어 사용에 다소 혼선(비정합성)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한다.

    왕필(본)은 대구(對句)를 선호한다. 예를 들면, 왕필본 노자1장 주석에서 위지연(謂之然)이란 어구를 만들어 위지현(謂之玄)과 대비시키며 현(玄) 해설에 활용하였고, 백서본의 '기득(旣得)...기지(旣知)'를 왕필본에서 '기지(旣知)...기지(旣知)'로 바꾸고 노자지략에서 '기지(旣知)·미지(未知)...기지(旣知)미지(未知)' 형식의 (멋진, 알쏭달쏭한) 문장을 구사하였으며, 백서본의 대음희성(大音希聲)·천상무형(天象無形)을 왕필본에서 대음희성(大音希聲)·대상무형(大象無形)으로 (두운까지) 바꿔 노자지략에서 노자 핵심사상 설명에 활용하였다.

  • 왕필은 상과 관련된 노자 원문을 일부 수정하거나 (부득이하게) 곡해한 것으로 보인다.

    노자 원문에 '유약이 강강을 이긴다'는 문구가 있으나 왕필은 (해당 부분 주를 달지 않고) 노자지략에서 불유불강(不柔不剛)을 상(常) 설명에 사용하였다. 노자55장 백서갑본과 죽간본의 지화왈명(知和曰明)이 왕필본에서 지상왈명(知常曰明)으로 바뀌었는 바, 노자16장의 지상왈명(知常曰明)과 일치시킴으로써 두 상(복명과 조화로움)의 통합을 시도한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성인은 백성에게 인(仁)을 베풀지 않으며 백성을 해치지도 않는다는 뜻의 불은불상(不恩不傷)이란 용어가 노자지략에서 사용되었는 바, 이는 노자60장 백서본의 "성인은 (귀신을) 해치지 않는다[聖人亦弗傷也]."가 왕필본에서 "성인은 사람을 해치지 않는다[聖人亦不傷人]."로 바뀌는 계기가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노자14장 백서본의 일자(一者)가 왕필본에서 삭제되었고 일자를 묘사하는 기상불교 기하불매(其上不皦 其下不昧)에 대하여 하상공은 하나[一]가 하늘 위에 있어도 밝게 빛나지 않고 하늘 아래에 있어도 어둡지 않다[一在天上不皦 一在天下不昧]라고 하나[一]와 관련지어 주를 달았지만 왕필은 노자14장에서 관련 부분 주를 달지 않고 다른 장(노자16장과 55장 왕필주)에서 불교불매(不皦, 不昧)를 상(常)을 설명하는데 사용하였고 노자지략에서는 성인(聖人)을 묘사하는데 활용하였다.

    백서본의 "오늘날의 도를 붙잡아 오늘날 일어나는 일을 제어하면서도 옛 비롯(시원)을 알므로 이를 일러 도의 벼리라고 한다[執今之道 以御今之有 以知古始 是胃道紀]."가 왕필본 노자14장에서 '옛날의 도를 붙잡아 오늘날 일어나는 일을 제어하며 능히 옛 비롯(시원)을 안다. 이를 일러 도의 벼리라고 한다[執古之道 以御今之有 能知古始, 是謂道紀]."로 바뀌었다. (왕필이 상정한) 상(常)이란 옛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변함없이 통하는 그 무엇이라고 가정할 경우 백서본보다 왕필본의 문구가 상(常) 관련 서술에 유용하다 하겠다. 왕필은 노자14장의 표현을 노자지략에서 상(常) 관련 서술에 활용하였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常)을 통해 무(無)를 유(有)의 영역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왕필의 시도는 방식이 참신하고[창의적이고] 진지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다만 노자 범위 내에서 본인의 생각을 녹여 냈으면 좋았을 것이다. 왕필 본인의 견해를 피력하기 위해 노자 원문을 다소 훼손한 것으로 추정되는 점은 왕필의 노자에 대한 태도[견해]를 엿보이게 한다. 그리고 노자지략에서 다소 현학적인 표현을 즐기는 면이 있으나 '봐줄만한 정도'라고 생각한다.

    윤상(倫常)을 살리는 현덕(玄德)과 오늘날의 유(有)를 제어하는 지상(知常)은 숭본식말(崇本息末)이나 유무상생(有無相生)과 일맥상통한다고 본다. 왕필에게는 현(玄)과 상(常)이 노자를 설명하는 키(워드)였다고 할 수 있다. [2024-09-09 작성]

※ 백서본도 왕필본의 장으로 통합 표기하였음. [예를 들면, 백서본제45장은 왕필본1장에 해당하나 백서본 왕필본 공히 노자1장으로 표기]
※ 본 자료[초적 작성 왕필의 상이란 무엇인가]는 자의적 해석이 포함되어 있어 (어느 정도 검증될 때까지) 복사[퍼가기 또는 부분인용] 방지 설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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